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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변원고_3.1절 기념식 고등학생 웅변원고(독립정신)

3.1일 운동의 정신을 이어나가자
안녕하십니까.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학생으로서 3.1절에 대한 의의를 다시금 떠올리고 고취시키고자 하기 위해서입니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산천에 태극기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우리 민족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합니다.현재 우리세대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이유는 노예로 살기를 거부하고, 억압된 역사 앞에 정면으로 대항한 선조들의 자주독립정신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아래, 일본 제국주의는 무력으로 우리 민족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무엇보다 일제의 경제적 착취는 매우 심했으며 토지 조사사업과 산림령을 통해서 우리 국토의 절반을 강탈하였습니다.당시 일제 식민통치의 최대의 피해자는 농민이었습니다.일본 총독부를 비롯한 식민지 착취관과 일본인 지주, 조선인 친일파 지주의 착취는 농민을 기아선상으로 내몰았습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여 유랑민으로 전락하였고, 급기야 정든 조국을 떠나 만주, 연해주 등지로 이주해야 했습니다.이 모든 것이 나라 잃은 자국민들이 받은 불공평한 대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망국노의 생활을 계속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으며,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3.1일 운동은 일본에 유학중인 한국학생들이 동경에서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이 그 시초였습니다.훗날 2.8 독립선언이라 알려졌던 이사건은 3.1일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이 소식은 선언서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당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종교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었습니다.이후 종교지도자였던 손병희 선생, 이승훈 선생 그리고 한용운 선생을 중심으로 민족 연합이 형성되었습니다.곧 이어 민족대표를 결정하고 3.1일 파고다 공원에서 비폭력 만세시위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였으니 이것이 3.1 운동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3월 1일, 우리 민족은 자유를 위해 일본에 대항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민족이 봉기하였습니다.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민족의 절반인 1천 만 명이었습니다.
3.1 운동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고, 전민족이 궐기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습니다.3.1운동에 대한 일제의 기본입장은 무조건적인 폭력탄압이었습니다.따라서 4월에 들어서면서 평화적 시위가 무분별한 탄압에 의해 폭력시위로 변화하게 됩니다.정당한 주장에 억압하는 폭력에 대한 저항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운동은 범 국민적인 민족운동이었으며 또한 민중이 민족해방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독립운동의 이념을 지닌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동시에 민주주의와 공화제를 독립된 나라의 목표로 설정한 일도 민족운동의 큰 성과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괄목할만한 점은 세대와 종파를 초월하여 민족이란 이름으로 단결하여 거대한 민족운동의 단초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나라와 개인적인 인간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그 분들의 정신을 잊어가는 것 같습니다.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정신과 노고가 없었다면 현재 안정적이고 편안한 개인의 삶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안정된 삶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 그분들의 희생을 생각하며 오늘 같은 날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우리는 불공정한 일에 맞서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는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앞으로도 이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삼일절을 맞아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하기를 바라며, 순국하신 많은
애국투사들의 얼을 기립니다
지금까지 제 이야기를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0년 00월 00일
고등학교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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