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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스피치_독서 동호회 강사 3분스피치(헌책, 즐거움)

헌책의 즐거움
지하철을 두 번 타고 열일곱 군데쯤 되는 역을 지납니다.y
그리고 낙성대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갑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앞을 바라보면 여러 개의 간판 사이에서 드러나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흙 서점.책방 이름이 좀 남다르긴 합니다.
서점 앞엔 낡은 책과 음반과 비디오 같은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방금 들어온 책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더미들 사이로 서점의 문이 숨어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드문드문 책을 들고 읽거나 살피는 사람들이입니다.
저도 물건 찾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책 구경을 시작 합니다.y
오래전에 꼭 읽고 싶었는데 그만 구입하는 걸 놓친 책도 있고, 한껏 젊은 날 분기탱천해서 읽었으나 그 의미조차 잊은 책도 보입니다.
이젠 사라진 출판사의 책들, 이 세상을 떠난 저자들의 책도 있습니다.
세월을 달리하는 낡은 책들 사이에서 제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 합니다.
아주 멀리 밀려나 있던 제 인생의 갈피들이 주르륵 한바탕 물결을 일으키는 기분입니다.
책은 단지 인생의 갈피를 이리저리 젖히게 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책이 마구 읽히던 시절, 어떤 책들이 인기를 끌던 시절들이 모두 그 작은 헌책방에 모여 제 인생과 겹쳐집니다.
지금은 중견을 넘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언론인.
그가 아주 팔팔해서 우리 사회와 역사에 묻히거나 숨겨놓은 거짓을 참지 못하던 정의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책도 있습니다.y
너무 날카로운 정의감, 아직 여물지 않은 풋정의감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그렇게 쓰던 때가 있었지, 속으로 웃습니다.
하기야 좋은 약에도 독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좋은 보약도 누구에게나 듣는 건 아니니까.
이 나이 되도록 겨우 이거 하나 깨달았다 싶습니다.y
어쨌든 책 여러 권을 한 권 값에 사서 들고 돌아왔습니다.y
그중 어떤 사회과학 책을 펼치니 주인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첫 장에 구입 당시의 감회를 꾹꾹 눌러 쓴 글이 있습니다.
여기에 그것을 옮길 수는 없지만 글에는 젊은 기운이 훅훅 끼쳤습니다.
젊다는 것은 갈등과 고뇌에 붙인 이름이겠지요.
그러니 갈등하지 않고 고뇌하지 않는다면 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책을 보니 도무지 알지 못할 책 주인의 고뇌를 통해 저의 옛 젊은 시절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아득하리라 여겼던 그 시절, 이제 늙은 저와는 상관도 없을 그 시절이 이리 금방 되살아나리라곤 상상도 못한 일 입니다.
젊은 날, 괴테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사서 그 책 첫 장에 왜 그리 무어라고 선언문 같은 걸 적기 좋아했던지!
지금 그런 책들은 모두 어느 고서점이나 혹은 휴지가 되어 사라졌을 것입니다.
헌책을 쌓아놓고 있으면 마치 먹고 싶다가 먹지 못한 음식을, 마침내 푸짐하게 차려놓고 혼자 맛보는 기분입니다.
어떤 철학 서적엔 페이지마다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습니다.
더러는 그 밑줄이 저의 생각과 맞아떨어지고 어떤 부분은 왜 여기에 밑줄을 그었지?
그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y
잠깐 타인의 마음을 더듬는 것도 즐겁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마음이나 생각을 가늠하는 것 말고 나보다 먼저 책을 읽은 독자의 마음을 느끼는 재미도 보통이 아닙니다.
다른 인생과 교감하는 즐거움이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즐기는 채팅이라는 게 이런 것과 흡사한 걸까요?
다시 한 번, 나는 모르되 취향이 같은 독자 한 사람의 인생을 느끼며 독서를 시작하려니 갑자기 내 인생에 빛이 반짝 돋는 기분입니다.y
사소하고도 깊은 맛입니다.
경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y
2000년 00월 00일
독서 동호회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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